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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의 지난 발자취
    카테고리 없음 2021. 12. 27. 01:31

    여러분은 서울에서 근대의

    풍경을 맛볼 수 있는 곳,

    하면 어디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정동의

    공사관 거리를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왜 하필이면 서구 열강의 공사관들이

    정동에 모이게 된 것일까요?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자리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지만,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태종이 계모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기면서

    이름만 남은 정동!

    오늘은 정동의 지난

    발자취를 살펴볼까 합니다.

     

    사실 조선은 외국 공관의 사대문 안

    진입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1880년 우리나라에 개설된

    첫 공관인 일본 공사관은

    사대문 바깥인 지금의 서대문

    천연동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청군과 일본군이 도성 안에 주둔했고,

    금역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새 경계선으로 정해진 것이

    개천 즉 지금의 청계천이었지요.

    조선 조정은 종묘사직이 있는

    청계천 안쪽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외세를 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1883년, 이마저도 무너지고 맙니다.

    미국공사관이 사대문 안 정동에

    자리 잡으면서 서구 열강의

    본격적인 정동 진출이 시작된 것이죠.

    정동은 서양 외교관이나 선교사,

    그들의 가족에겐 여러모로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인천항과 근접한

    한강변 마포나루와 양화진이 가까웠고,

    경복궁이나 경운궁이 지척이라

    왕이나 고관대작을 만나기에도 좋았죠.

    또 사대문 성곽 안쪽이어서 안전하고,

    비교적 넓은 가옥을 매입할 수 있었으니

    최적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후발주자인 미국은 어떻게

    터줏대감 격인 일본과 청나라의

    틈을 비집고 사대문 안 정동에

    전격적으로 상륙할 수 있었을까요?

    그 배경은 1882년 미국과 조선의

    수호조약 체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약 체결 후 조선에 부임한

    미국 초대 공사 푸트는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돌프를 통해

    공관부지를 소개받았는데요.

    이는 당시 통역을 맡았던 윤치호의

    처갓집이 정동에 있었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푸트가 공관으로 제공받은 집은

    사실 고종의 외척이자 강원도 관찰사였던

    민치상의 아들 민계호의 집이었는데요.

    그런 집을 외국인에게

    선뜻 내어 준다는 것은

    고종의 윤허 없이는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단돈 2200달러에 125칸의 한옥을

    거저 얻다시피 한 푸트는

    정동에 정착한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고,

    이 집은 미국 공사관을 거쳐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후 영국(1884년), 러시아(1885년),

    프랑스(1889년), 독일(1891년),

    벨기에(1901년) 등 열강의 영사관과

    공사관이 속속 합류하면서

    정동은 조선의 대표적인

    조계지(租界地)가 됐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황궁이었던 경운궁,

    즉 오늘의 덕수궁이 이들 공사관 거리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고종은 ‘먼 나라와 친교를 맺어

    가까운 나라를 공략한다(遠交近攻)’는

    계책에 따라 서구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과 청의 야욕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실제 미국 공사관이 정동에 터를 잡은 지

    13년 후인 1896년 2월 11일,

    명성황후가 참변을 당한 경복궁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던 고종이

    미국 공사관 안쪽 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인데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 9일을 머문 뒤 이듬해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1919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경운궁과

    정동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동의 최고 전성기는

    조선이 열강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웠던 근대의 새벽이었습니다.

    당시 정동은 외국 공사관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 배재학당, 이화학당,

    구세군 본영, 정동 제일교회 같은

    모두 25개의 큰 건물이 들어선 서울에서

    가장 화려하고 분주하던 동네였으니까요.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나서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변경됐습니다.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은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어

    덕수궁의 정문이 되었고,

    경운궁은 공사관과 교회,

    학교 용도로 야금야금 잠식당해

    본래의 3분의 1 크기로 줄어들었죠.

    그것도 모자라 조선총독부는

    궁궐 부지 2만여 평 중 절반을

    ‘중앙공원’으로 지정하고

    일본의 상징 벚나무를 심어

    유원지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정동엔 근대의 향기만 흐릿할 뿐입니다.

    한국전쟁과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미국 공사관저와 옛 러시아 공사관

    3층 석탑의 잔재 이외에

    모두 땅속에 묻혀버렸죠.

    서구 열강의 자존심을 건

    건축의 경연장이었던

    정동 옛 공사관 거리가 그때

    그 모습으로 보전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중국 상하이가 조계지 와이탄(外灘)을

    멋지게 꾸며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서

    정동의 근대 풍경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은 왜일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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