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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계획의 큰 축을 성공시킨 영입 인재카테고리 없음 2021. 12. 26. 12:32
아득한 달나라까지
왕복 80만 km 길을 다녀오려면
아주 강력한 우주발사체
로켓이 필요합니다.
즉 1960년 당시 미국이
아폴로 우주선을 달에 보내려면
2013년 우리 대한민국이
쏘아 올린 나로호 로켓보다도
무려 20배 이상 더 강력한 로켓이
필요했던 상황인데요.
아폴로 계획의 첫 난제는
바로 이런 전무후무한 위력의
로켓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40, 50년대 미국은
대부분 기술에서 세계를
선도했음에도 로켓 분야의
기술만큼은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의 부족한 역량을
메워줄 핵심인재가
절실히 필요했고,
이때 미국이 찾은 인물이
바로 독일 출신의
베르너 폰 브라운이었습니다.
그가 새턴 파이브(V) 로켓을
성공리에 개발함으로써
아폴로 우주선은 비로소
달로 날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는데요.
폰 브라운의
성장을 들여다보며,
영입인재를 안착시키고
능력을 펼치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세계 로켓 연구는
독일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재는 바로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였죠.
폰 브라운은 사실
유년 시절만해도 공부에
딱히 흥미도 재능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사준 망원경으로
밤하늘 속 우주를 관측하고,
1923년에
헤르만 오베르트 박사가 쓴
『행성 간 우주여행을
위한 로켓』이라는
책을 읽다 로켓의 매력에
매료되었는데요.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1927년에 결성된
‘우주여행협회’,
즉 Verein fur Raumschiffahrt라는
단체에서 적극 활동하며
로켓 제작과 발사시험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도 베를린 공대로
진학해서 기계공학과
물리학을 전공했고,
나중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골수 우주 덕후,
로켓 덕후였고,
덕후질을 위해
박사학위도 받아
‘덕업 일치’를 이룬 셈입니다.
이때 폰 브라운이
활동한 우주여행협회
덕후들을 주목한 사람이
독일 육군의 포병 장교
발터 도른 베르거였습니다.
그는 로켓이
미래 첨단 군사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아채고,
폰 브라운과 동호인들을
육군 엔지니어로
채용하죠.
안타깝게도 폰 브라운과
그 동료들은
자금난에서 벗어나
개발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살상하려는
나치와 타협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히틀러의 보복 무기,
즉 V-2란 제식 명칭으로
잘 알려진 인류 최초의
장거리 유도 탄도미사일
A-4 로켓이었습니다.
독일군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이 V-2를 영국,
벨기에, 프랑스 등으로
3천 발 이상을 발사해서
연합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죠.
미국은 그때
로켓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눈앞의
경쟁을 이기는데만
정신이 팔려, 경쟁 이후 상대의
역량을 흡수할 준비에는
치밀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는데요.
파악된 독일의
로켓 핵심인력들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초
페이퍼 클립 작전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전쟁 막판에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 기슭으로
피신한 핵심 로켓 기술자들을
재빨리 생포하는 데 성공하죠.
결론적으로 핵심인재를
알아보고 빨리 선점하는
대응력 덕분에 소련보다 앞서
폰 브라운을 비롯한
127명의 로켓 연구팀을
모셔올 수 있게 된 것인데요.
자, 그렇다면 뛰어난
인재를 영입하면
모든 게 끝일까요?
사실 기업 인사파트에서
일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외부 핵심인재는 영입도
어렵지만, 조직에 제대로
안착시켜 성과를 내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폰 브라운을 안착시키고
성과를 이끌어 냈을까요?
미국은 폰 브라운의 성향과
그가 나치와 손잡게 된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꿈과 도전의
열망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조직이
그 꿈을 이뤄갈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만 준다면
더 큰 열정과 리더십을
불사르며 능력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말이죠.
그래서 미국은 폰 브라운을
오직 실력으로만 평가하고
아낌없이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폰 브라운이 미국에 왔을 당시
나이 갓 서른셋,
요즘 대기업의 과장급
초급간부 나이였죠.
게다가 그는 나치당에 입당한
친위대 장교 전력이 있었습니다.
세간에서는 굴러들어 온
나치 과학자에게 너무
중책을 맡기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 들끓었지만 미국은
나이가 무색하게 탁월한
폰 브라운의 능력을 믿고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우주경쟁에 쓸 강력한 차세대
로켓을 개발하는 막중한 임무를
그가 이끄는 독일 출신
개발 팀에게 위임해
안착을 도왔죠.
그럼 여기서
1960년대
미국의 핵심인재로
안착했을 당시 폰 브라운의
발표 영상을
한번 만나볼까요?
(영상 삽입)
인터뷰의 직접적인 뜻은
능력만 보고 차별 없이
동등한 고용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속엔 위대한
목표를 위해 국적과 인종,
나이를 불문하자는 미국의
인재 활용 철학이 잘 나타나 있죠.
영입 인재를 다룰 때
범하기 쉬운 또 한 가지 실수는,
결정적 순간에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언젠가
떠나갈 사람이고,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핵심인재 유치에
실패에 가장 큰 요인인데요.
폰 브라운 팀에 맡겨진
로켓을 만드는 업무는
설계부터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실제 제작과 시험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속출했죠.
여느 개발팀 같았으면
대번에 힘을 잃고 와해되었을
위기가 계속 이어졌는데,
위기 속에서 미국 역시
나치 전범 기술자들을
계속 믿어야 하나 흔들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 맞서
폰 브라운과 독일 출신 동료들의
30년 팀워크는 하나하나
난제를 극복해냈고,
그 극복의 과정에는
늘 한결같이 그들을 믿어주고
신뢰하는 미국 정부와
아폴로 11호 프로젝트 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추력이
790톤에 이르는 거대한
F-1 엔진 5개를 묶은 1단 로켓,
추력 49톤급의 J-2 엔진
4개를 묶은 2단 로켓,
J-2 엔진 1개를 쓴
3단 로켓을 층층이 쌓은
새턴 V 로켓의 성공으로 이어졌죠
자, 여러분.
아폴로 계획의 큰 축을
성공시킨 영입 인재,
폰 브라운과 독일 출신 동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셨는지요?
큰 그릇을 갖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리더 분이시라면,
덜 여문 갓 서른셋의
폰 브라운 팀을 영입해
같이 꿈을 꾸는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위대한 문샷을
날리도록 북돋워준
미국의 영입 인재 관리 경험을
적극 응용해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