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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은 권력
    카테고리 없음 2022. 3. 12. 23:44

    지금 이 시대를 우리는 영상의 시대라고 말하곤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유튜브가 그 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데요. 이런 시점에서 우리가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꽤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영상이라 고 하는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지적 호기심들이 채워지고, 영상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뜯어보면서 우리가 오늘도 수없이 만나고 스쳐왔던, 영상이 콘텐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오늘 첫번째 시간으로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영상은 권력이다’입니다. 이 내용을 이야기하면 제가 항상 예를 들고 싶은 것이 바로 축구장 이론입니다. 축구장 이론, 처음 들어보신다고 요? 네, 제가 지은거라서 그런가 봅니다.

     

    사진출처 뉴스와이어


    한번 떠 올려 보시죠. 여러분이 거실에 앉아서 축구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창 신나게 축구경기를 보고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때 티비에선 꽹과리 소리, 북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고 있는데, 이게 실제로 경기장 에서도 내가 듣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걸까? 여러분도 이런 생각해 본적 있으세요? 그걸 확인할 길은 없었습니다. 당장 그 축구장에 갈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축구장에는 방송중계팀이 설치한 수많은 마이크 들이 있는데, 다른 마이크 채널의 볼륨보다 그 꽹과리 쪽 마이크의 볼륨을 더 높여서 실제로 경기장에서는 그리 의미있게 크게 들리지 않는 소리임에도 티비에서는 엄청나게 큰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요? 네 티비에는 시청자인 나와 축구경기장 현장을 이어주는 중계자가 존재하기 때문이 죠. 왜 그 중계자인 영상제작자는 꽹과리 소리를 왜 그렇게 크게 높여야 했을까요? 거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영상제작자가 그 소리를 너무 좋아했을 수도 있고요. 뭐 그런 건 어째도 좋습니다.

     

    사진출처 체인지온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중계자를 통해 현장을 보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그안에는 제작자의 의도가 개입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장에서는 꽹과리 소리가 엄청크네? 라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모든 영상에는 제작자의 의도가 있다는 것이죠. 한가지 더 얘기를 해보죠. 우리 나라 선수가 사이드라인을 돌파해 멋지게 크로스를 올렸습니다. 그 공을 받은 공격수가 볼을 드리블하다가 슛을 날리기 직전 상대방의 거친태클로 우리 나라 선수는 그만 넘어지고 맙니다. 고통을 호소하며 데굴데굴 구르는 선수와 거친태클을 건 상대방 수비수 사이에 관중들의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집니다. 당연히 패널티킥이라고 생각했는데, 심판은 반칙이 아니라며 거칠게 손을 흔들고 경기를 속개시킵니다. 관중들의 야유는 이번엔 심판을 향해 쏟아집니다. 잠시 후 볼이 아웃되고 티비의 화면은 이제 아까 그 반칙같았던 그장면의 리플레이 화면이 나옵니다. 고속카메라로 정교하게 그 상황이 리플레이되고, 중계팀은 발이 걸려 넘어진 듯한 그 장면을 여러번 다양한 화면으로 보여주지만 화면상으로도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 여러분께 이제 퀴즈를 내보도록 하죠. 이렇게 논란의 여지가 많은 리플레이가 끝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중계팀 피디라면 리플레이가 끝난 후 현장 중계화면의 첫장면으로 어떤 화면을 보내겠습니까.

     

    사진출처 디지털인사이트


    경기장이 가득찬, 널은 경기장 화면? 아뇨, 백이면 백. 심판의 얼굴을 가득 화면에 담습니다. 이 화면에는 반칙이 확실하고 심증도 확실한 우리나라 팀의 패널티킥을 날려 먹은 저 심판이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한 번 더 봐보자. 라는 부조정실의 확실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티비만 볼 뿐인데, 이런 류의 수많은 영상제작자들의 메시지에 우리는 전후반 90분 내내 노출됩니 다. 우리가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죠. 우리가 영상을 본다는 건 수많은 영상제작자들이 그들의 의도한 것을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말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경계가 뚜렷이 나뉘어진 아주 불평등한 구조인 셈이죠. 그래서 영상제작자들은 항상 영상을 통해 권력가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진출처 원주투데이


    영상이 강력한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원하는 것을 부각시키고 원치 않는 것을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이, 그 티비라는 미디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편집 혹은 연출이라고 하죠. 강의장에 누군가가 홀로 앉아 연신 더위를 호소하듯 땀을 닦으며 앉아있습니다. 시청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오늘 날 씨가 무척 덥구나. 강의실엔 그 흔한 선풍기도 없나 보네? 라고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 하나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은 이럴 수 있습니다. 알고보니 그 강의실엔 그 친구 혼자만이 아니라 카메라 반대편에 열댓명의 학생들이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강의실은 사실 에어콘이 없어도 될 만큼 그리 덥지 않았던 공간일 수 있고요. 단지 이 주인공이 강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지하철 역에서부터 달려왔고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맨 뒤에 앉아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이죠. 자 이렇게 이 주인공이 왜 땀이 났는지, 카메라 반대편에 있는 학생들을 두고 왜 혼자 앉아있는지에 대한 이유는 삭제한 채, 왜 이 친구는 더운 강의실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이 되어야했을까요. 당연히 그건 이 영상을 기획하고 연출한 제작자의 의도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명확히 경계가 지어진 그래서 듣는이들이 제한된 정보와 상황에 노출되어 사실과 진실 사이속에서 주춤하게 만드는 영상의 힘입니다. 실제로 이때문인지, 영상은 많은 세월, 독재자들의 선 전도구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상제작자들은 이 편집이라는, 연출이라는 직업병을 안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저 화면에 벤치에 누군가가 앉아있죠. 누군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저런 장면을 보면 저같은 영상제작자들은 저기에 왠지 배경음악 하나를 깔아보고 싶고, 왠지 줌을 당겨보고 싶습니다. 영상안에서 영 상제작자들은 마치 신의 권능을 받은 전지전능함을 부여받은 존재처럼 행동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트루먼쇼가 그 연출가의 욕망과 그림자를 잘 투영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시헤이븐이라는 거 대한 세트장은 트루먼이라는 남자가 사는 도시입니다. 이름처럼 이 투르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가짜들입니다. 그들은 트루먼이라는 영문도 모른 채 이 도시에, 아니 이 세트장에서 살게 된 사람을 속여가며 연기자인 것을 숨긴 채 하나의 거대한 리얼리티 쇼를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그 거대한 시헤이븐이라는 세트장을 만든 감독, 크리스토프는 시헤이븐의 창조자, 신으로 그려집니다. 영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권력, 그리고 그 권력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변주하는 권력가인 영상제작자들의 이야기를 비틀어낸 영화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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