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신화, 인간은 처음에 어떻게 탄생했나?카테고리 없음 2021. 12. 21. 23:27
신화의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창세신화입니다.
창세신화 속에는
한 민족의 원초적 우주관과 인간관이
집약돼 있지요.
한국 창세신화는 민간에서
구전으로 전해왔습니다.
함경도의 <창세가>, 제주도의 <초감제>,
경기도의 <시루말> 같은 자료가 있지요.
한국 신화는 처음 하늘과 땅이 생길 때
꽁꽁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거대한 신이 나타납니다.
미륵이라고도 하고,
도수문장이라고도 합니다.
그가 하늘과 땅을 뚝 떼어내자
밝고 가벼운 기운은 훌쩍 날아올라
하늘이 되고,
어둡고 무거운 기운은
성큼 내려앉아 땅이 됐지요.
둘은 다시 붙어서 하나가 되려고 했습니다.
거인신은 땅끝 네 구석에
거대한 구리 기둥을 세워서
하늘을 받쳤지요.
그래서 하늘과 땅은
떨어진 채로 머물게 됩니다.
그 사이에 인간세상이 자리를 잡았지요.
세상은 처음에
해도 달도 별도 없이 깜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네 줄기 빛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땅에서 청의동자가 솟아났는데,
앞이마의 두 눈에서
뜨거운 빛이 쏟아져 나오고,
뒤통수의 두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왔지요.
거인신이 그 눈들을 쑥 뽑아서
하늘로 던지자
앞의 두 눈은 태양이 되고,
뒤의 두 눈은 달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비로소
환히 빛나게 됐지요.
이상이 한국 창세신화의
첫머리입니다.
아득한 혼돈으로부터
창조가 진행되는 과정이
장엄하고 역동적입니다.
머나먼 태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붙어있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
제주도 신화는 이를
‘천지 혼합’이라고 표현하지요.
하늘과 땅이 뒤섞인 상황이란 어떤 것일까요?
위와 아래, 가벼움과 무거움,
맑음과 탁함이 따로 없다는 말이니
완전한 카오스(chaos)에 해당합니다.
하늘과 땅이 분별됨으로써
비로소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신화는 그 일을 거인 신이 했다고 합니다.
거대한 창조적 힘을 상징하는 존재이지요.
이야기는 갈라진 하늘과 땅이
다시 붙으려 했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본래 한몸이었으니
원상태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아닐까요?
그 운동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늘은 땅을 향해 끊임없이
햇살과 비 따위를 내려 보내고,
땅은 하늘을 향해 수많은
초목들을 키워내지요.
하늘과 땅으로 상징되는
이질적인 에너지가 역동적으로 어울리는 곳,
그곳이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매일 밤낮이 바뀌고,
수시로 계절과 기후가 바뀌며,
생로병사(生老病死)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엇갈리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세계지요.
세상이 왜 이리 복잡하고 만만치 않은지,
좀 이해가 되시지 않나요?
사진출처 중도일보 한국신화의 이런 세계관은 꽤 독특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의 세상이 매우 역동적이고
전투적이에요.
신들이 맞붙어 싸우면서
많은 분란이 펼쳐지지요.
한국신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곳은
바로 인간세상입니다.
하늘과 땅의 기운, 또는
음양(陰陽)의 기운이 한데 얽히기 때문이지요.
지상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설정입니다.
많은 신들이
인간세상의 삶을 원할 정도이지요.
신화에서 해와 달이 생겨난 과정도
역동적이고 흥미롭습니다.
땅에서 솟아난 청의동자는
태초의 시원적인 생명력을 떠올립니다.
‘청의동자’라 했으니,
푸르른 기운이었을 것 같아요.
그가 땅에서 유래했고
그로부터 해와 달이 생겨났다는 것은
어둠과 빛의 역설을 잘 보여줍니다.
검은 지평선에서 해가 뜨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지하 깊은 곳에 크나큰 열기가
깃들어 있다는 우주적 진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해와 달이 생겨난 뒤에 창조신이 한 일은
옷을 만들고 물과 불을 마련한 일이었습니다.
거인신 미륵은 이산 저산 뻗어가는
칡넝쿨을 벗긴 뒤
하늘과 맞닿은 베틀로
옷감을 짜내서 옷을 지어 입습니다.
그리고 생쥐한테 비밀을 캐물어서
물과 불의 근본을 알아냅니다.
산속 깊은 골짜기에서 샘물을 찾고,
차돌과 쇠붙이를 부딪쳐서 불을 만들지요.
여기서 창조신이 옷을 짜는 일은
단순한 의복을 넘어서
세계 질서를
직조(織造)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걸친
거대한 베틀이라는 데서 이를 알 수 있지요.
자연상태의 물과 불을 제어하는 일도
문명사의 발달을 함축하는 내용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주인공인 인간은
처음에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이야기는 창조신 미륵이
양손에 금쟁반 은쟁반을 들고서
하늘에 기원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찬란한 기운이 뻗치면서
금벌레 다섯 마리와
은벌레 다섯 마리가 내려왔지요.
지상에서 이슬을 먹고 자라난 금벌레 은벌레는
각각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됩니다.
남녀간에 짝을 지어 자식을 낳아서
세상에 사람들이 퍼지게 됐지요.
인간이 하늘에서 특별히 내려보낸
금빛 은빛 신령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늘 신의 속성을 지닌
특별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신의 분신이라서
그 안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한국 신화의 기본적인 세계관입니다.
세계 주요 신화에서 처음에 인간은
한 쌍이 탄생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한국 신화는 처음부터
열 명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다양한 존재로
시작됐음을 뜻합니다.
한국 신화에서 신들이 지닌 신성은
제각각으로 다양한데,
그것이 인간에게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깃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구약 창세기와 그리스신화,
중국신화 등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온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합니다.
하지만 한국 신화는 다릅니다.
인간이 작은 벌레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상에서요.
거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국 신화가 말하는 인간은 양면적입니다.
그는 하늘신의 정기를 지닌
신적 존재인 동시에,
지상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물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는 신(神)인 동시에 동물입니다.
신적 기운은 동물적 물질성
안쪽 깊이 잠재해 있습니다.
그것이 오롯이 발현되면
인간은 신적인 삶을 살 수 있지만,
갇혀서 스러지면 물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저는 그것을 각각 ‘신(神)의 길’과
‘물(物)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신적 기운이나 물적 기운이
험하게 뒤틀릴 때
‘귀(鬼)’가 됩니다.
세상에는 ‘귀(鬼)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가요? 여러분들은 하늘로부터
품수받은 ‘신(神)의 길’을 가고 있나요?
혹시 물(物)의 길이나 귀(鬼)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 창세신화가 던져주는
원형적 화두입니다.
감사합니다.